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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현대사로 보는 신냉전과 구냉전ㅡ2 우크라이나가 핵포기한 이유시사*이슈/우크라이나 전쟁 2023. 2. 27. 13:29반응형
3. 독립 이후 90년대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에는 나토 접경지역으로 많은 무기와 군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냉전이 종식되면서 이러한 무기와 군대는 애물단지가 되었다.
공산주의 체제에서 시장경제를 넘어가는 과도기 단계에서 한 번의 경제 실패가 있었고 이는 인플레이션 상승과 경제 위기를 일으켰다.
이에 유럽 재래식감축 무기 협정을 맺으면서 우크라이나는 재래식 무기를 해체하고 이를 다른 산업에 활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군대 수도 절반 이상 줄였다. 냉전 시절에 쌓인 군대 규모가 갓 독립한 우크라이나 경제로는 버티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경제가 어려운 시기라서 많은 젊은이들이 군대에 입대하려고 하여 경쟁률이 치솟기도 했다.
소련의 가장 강력한 해군 부대인 흑대함수도 문제였다. 이것을 우크라이나가 가져야 할 것인지, 러시아가 가져야 할 것인지 갈등을 빚였다.
러시아가 기습 오데사 항구를 점검하면서 군사적 대치 긴장도가 올랐으나, 추후 협상을 통해 우크라이나는 흑해함수를 인수하게 된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경제력으로는 흑해함대를 운용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러시아에게 함대를 임대 또는 판매를 재양도하였는데,
우크라이나가 흑해함대를 가진 이유가 군방력 강화보다는 이러한 이득을 얻기 위함이었다.
제일 애물단지는 바로 핵미사일이었다. 우크라이나 지역에는 소련 냉전 시절 만들어진 핵무기들이 너무 많았다.
문제는 우크라이나는 이걸 사용할 방법도 없었고 관리하기에는 너무나 큰 비용이 들었다는 점이다.
4. 부다페스트 안전 보장 각서
많은 사람들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핵을 포기했기 때문에 당했다고 생각한다. 이는 틀린 말이다.
하지만 위에도 언급했듯이 우크라이나는 핵무기를 사용할 방법도 없었고 오히려 관리하는데 큰 돈이 들여 경제에 악영향을 끼쳤다.
우크라이나가 포기하지 않고 핵무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지금 북한이 인민들의 삶을 파괴해가면서 핵무기를 만들고 가지려는 걸 옹호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크라이나는 핵미사일 176개, 핵탄두만 1800여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당시 세계 3위권 핵무기 보유량에 달할 정도였다.
무엇보다 이 무기들이 15년 뒤에는 고철이 되기 때문에 정말로 쓸모가 없는 무기였던 것.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쓰지를 못 한다.
초대 우크라이나 부총리인 이호르 유흐노우스키(Ihor Yukhnovskyi)는 가장 비싸게 부르는 국가에게 팔겠다고 할 정도였다.
이에 미국, 영국, 러시아는 이러한 핵무기가 자신의 경쟁국이나 테러 집단에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우크라이나와 부다페스트 안전 보장 각서를 체결한다.
우크라이나가 핵포기하면 미국, 영국,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침공하지 않겠다는 안전 보장을 받았다. (지켜주겠다가 아니다. 즉, 안전 보장 각서 때문에 미국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전할 명분이 생기는 게 아니다.)
또한 경제 지원 약속도 받았다.
미국은 약속대로 경제적 지원을 하였고 우크라이나의 핵과학자와 기술자 4500여 명을 민간 직업으로 전환하는 데에만도 1억8000만 달러의 비용을 지출했다. 그 후에도 미국은 CRT 프로그램 실행 당시 연간 4억달러, 4년 계획으로 총 16억달러를 책정하였으나 이후에도 프로그램 진행을 계속 되었고, 1991년부터 2012년까지 미국이 CRT 프로그램 실행을 위하여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카자흐스탄에게 지급한 금액은 누적으로 87.9억 달러에 달한다고 한다.
오히려 핵무기를 포기한 것이 우크라이나 경제 성장에 도움이 되었고 러시아로부터 지켜낼 수 있는 국방력을 키울 수 있었다.
5. 혼란을 겪는 우크라이나 경제
우크라이나 산업은 소련 붕괴로 처참했다. 냉전을 종식하니 미사일은 만들지 않는 시대였기에 미사일 기술은 지금 당장 우크라이나를 먹여 살리는데 필요없는 산업이었다. 그렇다고 앞으로 먹거리는 IT를 개발한 기업도 없었다.
농업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비옥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지만 기술력이 낙후되어 제대로 써먹지를 못 하고 있었다. 또한 공산주의 체제에서 자본주의 시장 체제로 바꾸는 것이 하루 이틀만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큰 혼란을 겪었다.
경제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소련 때가 더 나았다며 소련을 그리워하는 사람들까지 생기기 시작했다.
이에 크림반도 사람들은 우크라이나로부터 독립하고 러시아에 다시 존속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강해졌다.
이에 우크라이나는 전차를 보내 의회를 막는 등 과격한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크림반도 분쟁은 우크라이나 독립 직후부터 있었던 일은 추후 14년도에 일어난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이야기로 이어지게 된다.
5. 그럼에도 발전한다.
이러한 많은 어려운 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는 멈추지 않았다. 농업을 개선하고 새로운 산업을 발전 시킨다.
삭막했던 거리는 활기가 채워지기 시작하고 처음에는 어색했던 시장 체제가 자리 잡힌다.
소련 시절에는 억압 받던 우크라이나인들만의 문화도 꽃 피우면서 젊은이들은 자유를 즐긴다.
우크라이나는 핵포기하고 서방의 경제 지원을 받아 성장하여 성공한 사례로 남게 된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내 정치적 갈등은 해결되지 않았으니.. 이는 오렌지 혁명, 유로마이단 사태, 돈바스 전쟁 그리고.. 신냉전의 시작인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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