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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는 임시정부 독립을 원하지 않았다.시사*이슈 2024. 8. 16. 11:50반응형
1. 카이로 회담.
장제스가 우리나라 독립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고 알려져 있는 카이로 회담임. 그리고 이 카이로 회담에서 나온 카이로 선언 덕에 대한민국이 일제로부터 벗어나 독립으로 이어졌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임. 허나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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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 선언(1943. 12. 1)
3국(미국, 영국, 중국)은 일본에 대한 장래의 군사 행동을 합의하였다.
세 위대한 연합국은 해로와 육로, 항공로로 야만적인 적국에 대하여 끊임없는 압력을 가할 결의를 표명하였다. 이 압박은 이미 증대하고 있다.
세 위대한 연합국은 일본의 침략을 제지하고 이를 벌하기 위하여 이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 연합국은 자국을 위하여 어떠한 이익도 요구하지 않으며, 영토를 확장할 의도 역시 갖고 있지 않다. 연합국의 목적은 일본이 1914년 제1차 세계전쟁 이후 탈취 또는 점령한 태평양의 도서 일체를 박탈할 것과 만주·타이완 및 펑후 제도와 같이 일본이 중국으로부터 빼앗은 일체의 지역을 중화민국에 반환함에 있다. 또한 일본은 폭력과 탐욕으로 약탈한 다른 일체의 지역으로부터 축출될 것이다. 세 위대한 연합국은 한국 인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한국이 적절한 시기에 자유롭게 독립할 결의한다.
이를 위해 세 위대한 연합국은 일본과 교전 중인 여러 국가와 협조하여 일본의 무조건적인 항복을 받기에 필요한 중요한 작전을 장기적으로 계속 수행할 것이다.
「The Cairo Conference: Statement Released December 1, 1943」, RG 338http://contents.history.go.kr/front/hm/view.do?levelId=hm_143_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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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적절한 시기'임. 이 단어는 임시정부의 큰 반발을 불렀음. 적절한 시기가 아니라 '즉각'으로 바꿔달라고. 실제로 임시 정부의 걱정은 북쪽으로는 소련, 남쪽으로는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실현됨.
이런 '적절한 시기'에 대해 국민당은 어떤 행동을 보였는지 역사적 사료가 있음.
국무부 장관 대리(the Acting Secretary of State)가 주중 대사 (헐리, Hurley)에게
“이 문제에 대해서 6개월 전까지만 해도 전혀 열의를 보이지 않았던 중국 정부가 이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승인 문제에 대해서 미국(Unied States)의 지지를 조건으로 이를 주도하려 하고 있습니다. 본인은 미국 정부가 한국의 승인과 관련하여 중국과 거리낌없이 협조하기를 바랍니다. 중국 정부는 미 국무부(States Department)의 양해가 없이는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국무부가 중국에게 협조할 것임을 암묵적으로 알려준다면 중국은 대한민국(Republic of Korea)의 합법적 지위(de jure status)를 공식적으로 인정할 것입니다.”
귀 대사관에 통보하기 위해 장개석 총통(Generalissimo Chiang Kai-shek) 수석 비서(Senor Secretary) 샤오 유린(Shao Yu-lin)과 국무부 관리들 간에 개인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던 한국 문제에 관한 대담을 요약한 2월 5일자 비망록 사본註 002을 동봉합니다. 대사관은 샤오 유린과 국무부 관리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이 당분간 보류되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하기 바랍니다. 대사관은 재량껏 적절한 기회를 보아, ### 서한의 구절에서 인용된 내용을 비공식적으로 중국 외교부(Foreign Office)에 제시하고, 그럼으로써 샤오 유린과의 대담에 대해 언급하면서, 승인 문제는 미결 상태로 보류되어야 하며 전후의 한국에 관한 설문서 초안과 관련된 기본자료 준비에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 국무부(the Department)의 의견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기 바랍니다. 대사관은 또한 그 업무와 직접 관련된 관리가 와병 중이기 때문에 국무부가 그 지연기간 동안 설문서에 기초한 연구 준비를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중국 외교부(Foreign Office)에 알려주어도 좋을 것입니다.
https://db.history.go.kr/id/frus_001r_0010_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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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 승인을 당분간 보류되어야 한다는 점을 동의했다는 내용임. 이는 미국도 국민당도 동의한 바인데. 미국은 그렇다치고 '한국 독립'을 원한다고 알려진 '장제스'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 승인을 보류한 이유가 무엇일까? 사실, 장제스는 우리나라가 독립하여 정부를 수립하기 전까지 단 한 번도 '임시정부'를 인정한 적이 없음.
여기에 개인적인 생각을 보태면, 장제스는 한반도를 삼키려고 하는 의도가 있었다고 말하고 싶음. 이 주장에 근거가 무엇인지는 계속해서 알아보자.
2. 국민당은 대한광복군을 어떻게 생각했나?
https://db.history.go.kr/id/ij_010_0020_00540
너무 길어서 링크만 달겠음.
광복군 활동 9개 준승에서 알 수 있는 것은
1. 장제스는 대한광복군을 임시정부가 아니라 '하나의 당'의 군대로서 인정했다.
2. 대한광복군의 통수권은 임시정부가 아니라 '국민당'이 가지고자 했다.
https://db.history.go.kr/modern/level.do
중국영토내에서 군대를 창설하기 위해서는 중국정부의 양해와 승인을 얻어야 하는 문제도 있었다. 광복군을 창설하는 작업은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해야 하는, 즉 병력과 재정을 마련하고 중국정부와 교섭을 추진하는 일이었다. 중국정부와의 교섭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였고,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중국정부는 기본적으로 임시정부가 광복군을 창설하는 데는 찬성하였지만, 중국군사위원회에서 광복군을 통할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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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db.history.go.kr/modern/level.do?levelId=ij_010_0020_00750
乙. 한국의 희망
중국정부는 광복군에 물질적인 협조를 해주기 이전에 먼저 정치상 활동의 자유를 주기를 청구한다. 한국광복군의 敵은 곧 중국의 敵이다. 중국정부는 광복군의 抗倭運動에 대하여 반드시 깊고 절실한 동정을 하고 기꺼이 도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朱 部長은 이전에 위대한 동정심에 뿌리를 두고 광복군에 다방면의 조력을 하여 本軍은 대단히 감격하고 있다. 朱 部長이 대신 軍委會에 轉呈하여 즉시 전에 광복군의 활동을 금지한 通令을 취소하고 아울러 有關 각 기관에게 충분히 협조하고 연락하게 하여 本軍의 지위를 확정하고 抗倭工作 전개에 편리하게 해주기를 다시 청한다.
-중국 국민당 군사위원회에서는 인준받지 않은 한국광복군의 활동을 단속하라는 명령을 각 전구사령관에게 하달하였는데, 이러한 명령은 중국 당국의 협조가 절대적인 상황에서 한국광복군의 활동을 중지하라는 것과 다름없었다. 따라서 한국광복군이 활동할 수 있는 지역은 중국군의 관할 구역을 벗어난 일본군 점령지역뿐이었다.
또한, 정치상의 활동의 자유도 주지 않았다.
왜냐? 임시정부를 인정할 수 없었고, '중국에 있는 하나의 당' 결국은 중국이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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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db.history.go.kr/modern/level.do?levelId=ij_010_0020_00800
한국독립당 金九가 보낸 절략에 관한 簽呈
한국광복군은 명령을 받고 정식 편제된 지 몇 개월이나 되었으나, 아직까지도 사령부의 편제와 사병의 편성과 훈련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광복군 설립 과정에서 알 수 있다시피 국민당은 계속해서 대한광복군은 국민당 아래 두기를 원했음. 이것은 많은 바를 시사한데, 임시 정부는 대한광복군을 만든 것은 '자주 국가'로서 중국과 별개의 군대로 연합군 참전하여 '임시 정부'를 인정 받기를 원했음. 근데 그걸 계속해서 무마하려고 했던 것이 국민당인데. 이는 임시 정부 인정하지 않는 것을 넘어 중국에 있는 '하나의 당'으로서 인정만 하고 추후에 한반도를 삼키기 위한 발판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함. 이러한 시각은 여러 역사학자 전문가들에서도 나오는 의견임. (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041025/8120607/1)
3. 국민당과 임시정부 관계
앞서 말했듯이 임시정부는 오롯이 '한국'의 군대로 창설하여 한-중 합작 훈련을 통해 연합군 소속이 되어 '임시정부'를 인정 받고 '참전 외교'를 통해 '완전한 독립'을 하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함. 근데 사사건건 국민당이 반대했음.
정확히는 '장제스'가 반대한 거임.
1942년 국민당 내부에서도 한국 임시정부를 승인해주자는 말이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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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db.history.go.kr/modern/level.do?levelId=hdsr_006_0020_0020_0050
……중국이 항일전을 전개하기 이전에는 임시정부를 승인할 힘이 없었으나 26개국과 연합하여 대일항전을 전개하는 현재로서는 그 역량이 있으므로 한국의 독립을 원조하고 특히 임시정부를 승인할 것을 요구한다. ……한국임시정부의 23년의 혁명분투의 역사는 구주의 유망정부(流亡政府)와는 달리 성립시 한국민족을 대표하였으며 현재까지 한국민족을 대표하고 있다. 한국내에는 비록 상이한 당파가 있으나 제2의 임시정부는 없다. 미국내 수만의 한교는 최근에 회의를 개최하여 중경의 한국임시정부를 옹호한다고 하였으며 소련의 수만의 한인, 등삼성(東三省;만주)의 수만의 한인도 또한 임시정부를 옹호한다고 하였다. 이는 한국의 천만 인민의 의지를 증명하는 것이다. ……중국이 한국임시정부를 승인하고 나면 영국·미국도 이에 따를 것이고 소련도 이에 따라 승인을 할 것이다. 승인한 후에 한국임시정부는 역량을 키워 우리들이 동경(東京)으로 군사를 집합할 때 저들의 본국으로 돌아가서 부흥대업을 주도하게 될 것이다
국민당 정부 입법원장 손과(孫科)는 1942년 3월 그의 논술
국임시정부 승인에 관하여서는 이외에도 1940년의 『대공보(大公報)』 1943년의 『중앙일보(中央日報)』등에서 사설을 통해 임정승인을 주장하고 있으며, 1944년에는 중선부(中宣部)의 양한조(梁寒操)부장이 중국의 임정승인을 확신하였으며 항전시기 중국의 민의기관인 참정회(參政會)는 1944년 9월 제3계(屈) 3차대회를 개최하고 정부에 대해 한국임정의 승인을 청원하기로 의결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중국은 제 일 먼저 가장 절실하게 한국독립운동을 원조해야 하고 또한 가장 먼저 한국임시정부를 승인해야 한다는 것 등이 주장되었다.
그리고 1944년 9월 5일에는 임정 주석 김구와 법무부장 복순(濮純;박찬익)이 중국 국민당정부의 주석이자 국민당 총재인 장개석과 면담하고 중국정부는 합법적으로 한국임정을 승인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중국 국민당정부는 답변서를 임정측에 전달하여 중국정부는 이미 방침을 확정한 바이니 시기가 성숙됨을 기다려서 솔선수범할 것이라고 하였다.註 084
그러나 중국 국민당정부의 입장은 계속 유보적이었다.
(생략)
이와 같이 임시정부는 비록 형식상으로는 국제사회로부터 정부승인을 얻지 못하여 떳떳한 입장을 취하지는 못하였다.
그런데 끝까지 장제스는 임시정부 승인을 허락하지 않았음.
5P
한국임시정부에서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했다. 바로 보조비 형식이 아닌 차관 형식으로 재정 지원을 받으려 한 것이다. 그래서 1944년 2월 7일 김구가 주쟈화에게 정식으로 차관 요청을 제안하며, 매달 지급되는 200,000원의 보조비를 1,000,000원으로 늘려 차용을 신청했다.22) 주쟈화는 김구를 직접 만나서 의견을 나눈 뒤에 조치를 취하고자 했다.23) 실제로 한국임시정부의 차관 요청은 장제스로부터 거절당했다.24) 이보다 앞선 1942년 6월 9일에도 김구는 주쟈화에게 ‘信用借款’을 요청한 적이 있었다. 그때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25) 중국국민정부가 한국임시정부의 차관 요청을 수락하지 않은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추정된다. 지원 금액이 현저하게 늘어나게 될 수 있다는 점과 차관 수락이 곧 한국임시정부 승인을 의미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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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장제스는 절대 한국을 '국가와 국가' 간의 관계를 보지 않았다는 것임.
단순히 한반도를 중국 영향 아래 두기 위함에는 의심스러운 부분들이 많지. 만약, "명청-조선 관계, 하나의 국가로서의 병합이 아니라 미국,영국 위주로 돌아가는 세계 질서에 우리도 한몫하고 있다" "지금의 미국이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거랑 더 가깝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임시 정부를 승인을 안 할 이유가 전혀 없음.
그렇다면 왜, 어째서 계속해서 임시 정부를 승인하지 않았는지는 이전 장제스의 발언과 생각들을 보면 됨.
4. 장제스는 한반도를 어떻게 생각했나.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6237470
Such a territorial imagination was standardized by Sun Wen (孫文) and succeeded to Chiang Kai-shek(蔣介石) and Mao Zedong(毛澤東), and reflected in the plan for the East Asian order of the Republic of China.
이러한 제국주의적 정책의 연장선에서, 중화민국의 교과서와 역사 지리는 동아시아의 모든 조공국을 최근 상실한 중국의 영토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영토적 상상은 쑨원(孫文)에 의해 표준화되었고, 장제스(蔣介石)와 마오쩌둥(毛澤東)에 의해 계승되어 중화민국의 동아시아 질서 계획에 반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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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영토로 간주'했다는 점과 이것이 쑨원이 '표준화'하고 장제스와 마오쩌둥에 의해 계승되었다는 점을 주목해야할 거임. 단순히 조공국을 넘어 새로운 개념을 제시한 것이기 때문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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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19990302000141
1921년 12월에 행한 연설에서 쑨원은 왕조국가 시절 중국에 조공을 바치던 주변국가들을 "중국이 잃어버린 영토"라고 주장하는 등 중화주의 냄새를 풍기고 있다.
쑨원의 이런 사상은 특히 말년에 극으로 치달아 일본과 연대한 "대아시아주의"를 제창하기도 한다.
그는 사망 직전인 1924년 11월 일본에서 행한 "대아시아주의"라는 연설에서 일본과 중국이 공동으로 주도하는 아시아제민족의 연합,곧 대아시아주의를 내세웠다.---
이러한 사상은 현재 중국에게도 이어져서 '동북공정'의 명분이 되기도 함. 장제스 또한 쑨원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던 인물임. 아는 사람은 알다시피 현재 쑨원은 중국에서는 선행자, 대만에서는 국부로 취급 받고 있지.
그렇다면 장제스는 쑨원의 사상을 어떻게 이어 받았을까?
“우리는 동북 4성의 실지를 회복할 뿐 아니라 조선도 옛날부터 중국의 영토였기 때문에 수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https://www.drnh.gov.tw/p/404-1003-13921.php?Lang=zh-tw
“일본에게 빼앗긴 (중략) 조선을 탈환해야 한다, (중략) 쑨원이 남긴 과제 중 하나는 조선과 타이완을 회복하여 중화를 공고히 하는 것이다.”
https://www.drnh.gov.tw/p/404-1003-13050.php?Lang=zh-tw
라고 말했음.
다시 말하지만, 쑨원이 내놓고 장제스가 계승한 '중국이 잃어버린 영토'는 단순히 '조공국' 관계를 잃어버린 걸 의미하지 않음. 그는 진정으로 '중국의 영토'라고 생각했거든.
4. 정리
결국 장제스가 대만으로 쫒겨나면서 정확히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 지는 알 수 없게 됨. 다만, 임시정부 승인 받는 것을 반대한 것도 사실이고, 대한광복군을 통해 독립국으로서 인정 받으려고 하는 임시정부 노력을 번번히 무너트리면서 대한광복군이 중국에 복속되길 원했던 것도 사실임. 본인 입으로 조선을 중국의 영토라고 말한 것도 사실임.
그리고 다 알다시피 돈을 많이 지원한 것도 사실임.
내 생각은 장제스가 중국을 지배했으면 어떻게 됐을지는 또 모르는 거임. 무엇보다 대만 내에서도 장제스가 죽을 때까지 대만을 통치하고 후의 총리는 아들에게 물려주면서 독재자로 보는 시각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임시정부를 계승한) 우리나라는 6.25전쟁 이후 반공의 동지이자, 한 때 임시정부에게 많은 지원을 했던 것은 사실이기 좋은 이미지로 남은 사례라고 봄.
5. 결론결론적으로 장제스가 우리나라 좋은 일만 다 해주고 간 것은 맞으나, 그 이면에는 음흉한 속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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