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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년이 물었다. 아저씨는 누구냐고. 소년 앞에 갑자기 나타난 정체불명인은 아무 대답 없이 서 있었다. 그가 가진 건장하고 다부진 체격을 보고 옆집 대학생 형과 비슷한 또래가 아닐까하고 어렴풋이 짐작했다. 짧지만 길게 느껴지는 정적. 소년은 거실에 있는 엄마를 부르려고 할 때 남자가 말했다.
“수호천사."
메아리처럼 윙 윙 울리는 목소리. 소년은 남자의 목소리가 귀가 아니라 머릿속 안에서 들리자 혼란스러웠다. 잡음이 많은 라디오에서 들리는 듯한 목소리와 남자 얼굴 앞에 깔린 뿌연 안개가 - 그가 평범한 존재가 아니란 걸 확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거실에 있는 텔레비전에서 경쾌한 트럼펫 소리로 이루어진 아침 방송 오프닝이 들려왔다.
“너 지각하겠다."
남자가 말했다. 소년은 무어라 대답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소년은 그저 현관 신발장 앞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 소년은 갑자기 나타난 남자가 (표정이 안개에 가려져 있음에도)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수현아, 빨리 학교 안 가니? 아직도 머리 아파?"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시청하다가 현관문에서 서성이는 소년을 보고는 소년의 어머니가 다가와 물었다.
“여기 이 사람 안 보여요?"
소년이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누구? 아무도 없잖니. 장난치지 말고 빨리 가라. 지금 뛰어가면 버스 탈 수 있겠다."
소년의 어머니는 소년이 가리킨 곳을 쓱 보고는 소년을 보채며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남들한테 내가 안 보이나본데. 거울에도 안비치고."
남자가 말했다.
남자의 말에 소년은 신발장 앞에 있는 거울 보았다. 거울에는 당황한 소년만 비추고 있었다. 소년은 숨을 가빠르게 쉬었다. 그제서야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헛것이 아니고 '어떤 무언가'임을 알게 되었다.
‘귀신이구나.’
소년은 본능에 따라 천천히 현관문에서 뒷걸음쳤다. 그렇게 했다고 소년은 생각했었다. 사실은 현관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지만.
‘뭐야 이게?'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집을 나서고 있었다.
“수현아."
소년은 움찔했다. 속이 메스껍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자꾸 몸이 떨려 제대로 걷기가 힘들었다. 정신 차리고 앞을 보니 코앞에 남자가 있었다. 지금이라면 이 수상한 사람 얼굴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소년은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도 뿌연 안개 안에 있을 남자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단 하나는 볼 수 있었는데- 남자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지금부터 넌 달라질 거란다."
이상하게도 이 한 마디에 소년의 두려움은 눈 녹듯 사그라졌다.
2
한산한 버스정류장에 버스 시간표가 반쯤 뜯겨진 채 나부끼고 있었다. 소년은 흔들리는 시간표를 붙잡고 버스가 언제 지나갔는지 확인해보았다. 8시 40분. 방금 막 버스가 지나갔었다. 조금만 더 빨리 왔더라면 탈 수 있었다. 하지만 여유롭게 주변을 보며 느릿하게 걷는 남자 때문에 놓치고 말았다.
남자는 어린아이가 유원지에 놀러 온 듯 흔히 볼 수 있는 아파트 슈퍼마켓부터 담벼락까지 모든 걸 신기해하며 구경했다. 소년은 그런 남자를 무시하고 버스정류장에 가보려고 했었다. 남자와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몸이 움직이지 않고 남자를 향해 걸어갔다. 소년은 여유롭게 여기저기 구경하는 남자가 답답해 빨리 가자고 보챘지만, 소년의 마음을 모르는지 남자는 끝까지 이것저것 구경하며 걸었다. 더딘 여행 끝에 버스정류장에 도착한 남자는 정류장에서도 가만히 있지를 못 했다. 산만하게 버스정류장을 빙빙 돌며 지나가는 사람이나 자동차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소년도 가끔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릴 때 심심하면 계속 움직이곤 했었는데 그걸 남이 하는 걸 보니 얼마나 산만한 행동이었고 남을 불편하게 했는지 알게 되었다.
소년은 산만하게 움직이는 남자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정말로 수호천사가 맞을까? 일단 사람은 아니다. 소년의 어머니한테도 보이지 않았고, 목소리도 그렇고, 얼굴에 깔린 안개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고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렇다고 수호천사처럼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일단 날개가 없었다. 옷도 평범한 사람들이 입는 옷을 입고 있었다. 다만 유행을 따르지 않는 옷차림이었는데 전체적으로 검은색 바탕의 옷을 입고 있어서 차가운 분위기를 냈다.
‘굳이 말하자면 저승사자 같기도 하고.'
남자는 돌아다니기를 멈추고 소년을 바라보았다.
“너, 몇 학년이지?"
“중 삼이요."
“중 삼이라. 아쉽네. 더 이를 때 찾아왔어야 했는데. 아니지. 아직도 좋은 시기긴 해."
남자는 소년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고는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저씨."
“아저씨?"
“아저씨 정말로 수호천사 맞아요?”
“그럼 내가 뭐로 보이는데?”
“저승사자?”
소년의 대답에 남자는 호기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소년에게 그렇게 보였다.)
“너, 내 얼굴 안 보여?”
“네, 뿌연 안개가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예
“뿌연 안개라고?”
남자는 소년 옆에 있는 유리벽을 보았다. 소년의 모습만 비치고 남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저씨, 정말로 수호천사 맞아요?"
“옛날에 하던 만화 영화에 수호천사가 나오지? 두 명의 수호천사가 있는데 소원을 들어주는 애들 말이야.”
"티미의 못 말리는 수호천사요?"
"그래. 그거. 거기에 나오는 수호천사랑 비슷한 존재야. 만화랑 달리 확실히 널 바꿀 수호천사지만."
'옛날에 하던 만화라고?' 남자가 말한 만화는 학원 마치고 티비를 키면 아직도 반영하고 있는 인기 애니메이션이었다.
남자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내가 너한테 죄를 지었거든?"
남자는 또 한 번 소년이 이해할 수 없는 말로 대답했다.
“저한테 죄를 지었다구요? ”
“그래"
멀리서 버스가 오고 있었다. 남자는 그 버스마저도 무언가 웃기다는 듯 미소 지으며 쳐다보고 있었다.
남자는 정차한 버스에 올라탔다. 소년도 같이 올라타 지갑을 꺼냈다. 지갑에서 천 원짜리 지폐를 꺼내 버스 요금함에 넣었다. 잠시 뒤 거스름돈으로 나오는 동전이 리듬감 있게 떨어졌다. 남자는 동전 떨어지는 소리에 반응해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요금함을 보았다.
“아저씨는 이 세상에 있는 물건이 다 신기한가 보네요.”
“오랜만에 보는 것들이니까.”
남자는 소년의 집에서 버스정류장에 걸어왔을 때처럼 버스 안에서도 모든 걸 다 신기해하며 구경했다. 그런 남자를 뒤로 한 채 소년은 빈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을 풍경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가만히 앉아 있으니 여러 생각이 소년을 괴롭혔다.
-남자가 수호천사가 맞는지. 아니라면 무엇일지. 그냥 악귀가 아닐지. 죄를 지은 귀신이라는데, 나는 살아오면서 귀신을 만난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최소한 비슷한 존재를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남자는 버스 요금함을 보고 오랜만에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 내가 기억하지도 못 하는 아기 때 있었던 일인가? -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생각이 많아지자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소년은 조금이라도 어지러운 머릿속을 비우고자 창문을 살짝 열어 창문 틈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을 느꼈다. 선선한 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왔다. 소년은 한동안 아무 생각하지 않고 가만히 눈을 감아보았다. 몇 초만 했을 뿐인데 머릿속이 한결 개운해졌다. 스피커에서 다음 정거장이 소년이 다니는 학교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소년이 창문 밖을 보니 멀리서 신식 학교가 보였다. 소년은 남자에게 내려야한다고 말하려고 남자를 찾았다. 남자는 소년의 학교를 바라보며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수상한 사람. 아무리 생각해도 누군지 모르겠네. 아는 게 이상한거려나.-
버스가 학교 승차장에서 정차했다.
‘뭐, 속는 셈 치고 믿어보자.’
남자가 내렸고 뒤따라서 소년도 내렸다.
3
1교시. 소년이 교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국어 수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국어 담당 선생은 늦게 들어온 소년을 무시한 채 수업을 이어나갔다. 수업이 끝난 후, 아이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로 시끌벅적했다. 소년의 친구들은 소년에게 왜 늦었냐고 물었고 소년이 대답하려할 때 교실 스피커에서 소년을 찾는 방송이 나왔다. 소년은 대충 어물쩡 넘겨 버리고 나중에 말해주겠다며, 소년을 찾는 교무실로 향했다.
소년이 교무실에 가보니 소년의 담임 선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현아 어디 아프니? 어머님한테 전화 왔는데 어제부터 머리 아파했다면서?"
"네? 아..아프긴 했었는데 지금 괜찮아요."
"요즘 자주 그랬던 거 같은데 혹시 또 나빠지면 참지말고 양호실에 가거나 교무실에 오렴"
"네, 알겠습니다."
옆에 있던 남선생이 희선 쌤은 너무 착해서 탈이라고 말했다. 소년이 꾀병 뿌리며 늦게 오는 거라고 한 번 봐주면 계속 그런다느니 뭐니하며 쓰잘데 없는 이야기를 했다. 담임쌤은 수현이는 그런 애가 아니라고 변호해주었다. 확실히 다른 선생님들과 달리 착한 선생님이었다.
그 남선생 말과 다르게 꾀병은 아니었다. 실제로 소년은 밤마다 머리가 아팠고 늦게 잠들어 늦게 일어나는 일이 많았다. 오늘은 소년을 따라다니는 자칭 수호천사가 어물쩡되는 바람에 늦은 거지만.
뜬끔없이 남자는 소년에게 학교를 졸업해도 저 담임 선생님만큼은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씩 찾아뵈라고 말했다. 소년은 그래야겠다고 대답했다. 소년의 대답에 남자는 말로만 그러지 말고 진짜로 찾아뵈라고 말했다. 소년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2교시. 과학 시간이었다. 액화 질소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이었다. 용기 속에 있는 액화 질소가 기화하면서 하얀 안개를 내뿜었는데 아이들은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재밌어했다. 하지만 소년은 성인 남성이 듣기에는 지루한 수업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어른들은 뭐든지 다 아는 건 아니더라도.. 한 번 씩 학교에서 다 봤을테니까. 정작 남자는 소년보다 더 재미있어하며 수업을 듣고 있었다.
3교시. 수학 시간이었다. 소년이 가장 싫어하는 시간이었다. 소년과 마찬가지로 남자도 수학에는 흥미가 없는지 교실을 둘러보고 있었다. 남자는 쉬는 시간에 학교를 구경해달라고 말했다. 소년은 쉬는 시간은 짧으니 점심시간에 구경시켜주겠다고 말했다.
4교시. 도덕 시간이었다. 남자는 가장 쓸모없는 수업이라고 말했다. 소년은 맞는 말이라며 맞장구쳤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종 치는 순간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교실 문으로 뛰어갔다. 소년은 친구들에게 먼저 가라고 말했다. 아이들이 뭐하냐고 물었고 소년은 볼일이 있다고 대충 말한 뒤 교실 밖으로 나갔다.
“밥 안 먹어?”
“학교 구경 시켜주기로 했잖아요.”
“밥 먹고 해도 괜찮은데.”
“오늘 밥 맛 없거든요. 맨날 닭고기만 나오는데 퍽퍽해서 먹기 힘들어.”
“밥, 국, 고기반찬 나오는 게 어디야.”
“우리 아빠처럼 말하네요. 음..어딜 구경해주는 게 좋을까요? 보고 싶은 데 있어요?"
"아무 곳이든 좋아."
소년은 남자에게 어디부터 구경 시켜주는 게 좋을까하다가 도서관으로 가기로 했다. 변변치 않는 중학교에서 가장 자랑할 만한 곳이 도서관이었기 때문이다. 작년에 완공한 도서관은 3층으로 지어졌고 1층에는 컴퓨터실, 2층부터 3층까지는 다양한 책들이 구비되어 있다. 최근에 지은 건물이라 내부 인테리어도 말끔해 보기가 좋았다. 나름 학교에서 신경을 써서 도서관을 꾸몄다. 학생들이 그린 그림도 있고, 조형물도 있어 구경할 거리가 많았다. 남자도 마음에 들었는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구경했다. 그러다가 보드 게임이 모여 있는 곳에 멈춰 섰다.
“여기서 친구들이랑 자주 놀아요.”
남자는 탁자에 놓여 있는 할리갈리 보드게임에 관심을 보였다. 그는 종을 꺼내서 몇 번 눌려보았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이거 재밌었지.”
남자는 추억에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저씨 때도 이게 있었어요?”
“있었지.”
남자는 추억의 여운을 한껏 즐기다가 소년을 보았다.
“너 때가 가장 좋을 때야.”
“어른들이 하는 말은 다 똑같네. 난 어른이 되고 싶은데 어른들은 우리 때로 돌아가고 싶데요.”
“어른들의 소원이지.”
“요즘 하는 웹툰 중에 주인공이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는 내용이 있는데. 어, 뭐더라?”
“아, 기억난다. 무슨 엘리트 만들기였는데.”
“맞다. 맞다. 그거 보면서 매번 생각하는 건데 어른인 주인공이 어린 시절 몸 속으로 돌아간 거면 어린 시절 주인공은 어떻게 된 걸까요?
보드게임을 만지던 남자의 손이 멈추었다.
“그건 잘 모르겠네. 배 안 고프니? 식당도 구경해주라.”
“배고프네요.”
소년은 배를 만지며 답했다. 남자는 밖으로 나가자고 손짓했고 소년은 문을 닫고 식당으로 향했다.
4
남자가 하늘을 보았다. 밝은 달 하나에 구름 한 점만이 유영하고 있는 심심한 하늘이었다.
‘이때는 별이 좀 보일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절 도와주러 왔다면서 오늘 하루 종일 한 게 학교 구경하고 학원 구경한 것 밖에 없네요.”
소년이 같이 밤하늘을 보며 말했다.
“너 발표할 때 도와줬잖아. 학원 숙제도 도와줬고”
“그런 거 말고 더 특별한 거 없어요? 수호천사면 초능력 같은 거 부릴 수 있지 않나? 예를 들어 복권 당첨 번호를 가르쳐준다거나.”
“아! 그건 차근차근 하면 돼. 복권 따위로는 벌 수 없는 돈을 벌어주지."
“진짜요? 지금 당장은 안 돼요?.”
“아직은 어렵고 연애는 도와줄 순 있다.”
“연애요?”
“학원에서 네 뒷자리에 앉아 있던 여자애 좋아하지 않아?”
남자의 말에 소년은 귀가 새빨게졌다. 소년은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말문이 막혀 말할 수가 없었다. 남자는 당황스러워하는 소년을 보며 킥킥 웃었다.
"너 부끄러워하면 얼굴이 엄청 빨개지는 거 알아?"
“그, 그.. 어떻게 알았어요? 오늘 일부러 걔랑 말도 안 했는데."
“너 그 애 볼 때만 눈빛이 다른 거 알아?”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소년은 더 부끄러워져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리고 평소에도 걔랑 말 잘 안 나누잖아 부끄러워서.”
“……”
“예쁜 애긴 하지. 음, 확실히 예쁜 애야. 그래서 선뜻 말 걸기도 힘들고. 말해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고. 그래도 남자는 자신감이야. 나도 좋아했던 애들한테 말을 못 걸고 그랬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왜 말을 안 걸어봤나 싶어.”
“자신감이 중요하다는 말은 인터넷에서 많이 봤어요. 자신감을 내고 싶어도 막상 입을 열려고 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걸요.”
남자는 가까이 있는 길거리 벤치에 앉았다. 남자는 소년에게 앉으라고 손짓했다. 소년은 남자 옆에 앉았다.
“그럼 내가 대신 말해줄까?”
“다른 사람들은 아저씨가 안 보이잖아요?”
“네 몸에 빙의하면 돼.”
“빙의요?”
남자는 빙의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소년이 남자를 받아들이고 싶다고 생각을 반복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남자는 자신이 여자를 꼬시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데 소년의 몸을 빌려주기만 하면 된다고 말했다. 남자는 소년이 좋아하는 여자애와 반드시 사귀게 해주겠다고 약속하며 말을 끝냈다. 소년은 그제야 남자가 수호천사다운 일을 할 수 있겠다고 말했다.
구름 한 점이 달을 가려 주변이 어두워졌다. 안 그래도 주변에 있던 가로등이 약하게 빛나고 있어 달빛이 가리자 주변이 음산한 기운을 냈다. 소년은 갑자기 찾아온 꺼림칙한 기분에 몸서리쳤다. ‘주변이 어두워져서 그런가?' 소년은 기분 전환할 겸 방금 막 남자가 약속한 걸 되새겨보았다. ‘여자친구를 만들어 주겠다니. 진짜 수호천사 같잖아.’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소년은 빨리 집에 가서 더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고 남자는 알겠다고 말했다.
5
남자는 소년에게 한 약속을 지켰다. 남자는 소년 몸속에 들어가 소년이 좋아하는 소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에 소년은 자신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남에게 조종 당하는 게 처음에는 이상하게 느꼈다. 무언가 빼앗기지 말아야 할 것은 내주고 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남자가 능숙하게 자신과 좋아하는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호감을 쌓아가는 것을 보자. 남자가 없으면 그녀와 이야기도 어려워, 남자에게 자주 몸을 빌려주었다. 나중에는 소년이 여자애와 대화를 나누다가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워 할 때, 준비도 없이 바로 소년의 몸속에 들어와 대화를 이어나가기도 했었다. 소년은 갑자기 자기 몸을 뺏겨 기분이 언짢기도 했었지만 소녀가 웃는 모습을 보고 위안을 삼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소년도 소녀와 대화하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서로 놀고 먹고 밤에는 늦게까지 전화를 했다. 서로 안 맞는 것도 많았지만 비슷한 것도 많았다.
6
남자가 소년의 몸에 들어가는 날이 많아졌다. 승희와 이야기할 때 뿐만 아니라 수업 발표할 때도, 어떤 동네 형과 싸울 때도, 친구들과 놀 때도..
7
“제 몸이에요. 제 몸!!!”
소년은 큰 목소리를 남자에게 화를 냈다. 집에 돌아오기 전 소년은 소녀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소년은 이제 남자가 없어도 소녀와 잘 대화하고 잘 놀았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둘은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소년은 평소처럼 소녀를 집에 데려다주기로 했다. 헤어지기 직전, 주변에 아무도 없는 곳. 은은하게 빛나는 가로등 아래에서 소년과 소녀 사이에서 야릇한 감정이 오갔다. 소년은 ‘드디어’라고 생각했다. 눈을 감고 소녀의 얼굴에 다가갔다. 주변이 조용해졌다. 입술에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다. 자신이 잘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소년은 너무 긴장해서 그런가보다하고 생각했다. 눈 떠 보니 자신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소녀와 입 맞추고 있는 건 소년이 아닌 남자였다.
소년은 보이기만 하고 실체가 없는 남자에게 소리만 지를 수 있다는 게 너무나도 화가 났다. 소년은 뭐라도 말해보라고 사과라도 해보라고 말했다. 남자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소년은 그런 남자의 모습에 어이없었다. 소년은 더 이상 필요 없으니 떠나라고 말했다. 소년은 방문을 세게 닫으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가 방문 손잡이 잡아 문을 열려고 했지만 열 수가 없었다.
7
‘왜 그랬지. 조금만 더 참았으면 됐는데.’
남자가 손잡이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려보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남자는 오늘 자신이 했던 실수에 뼈저리게 후회했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조금만 더 기다렸다면 자신이 얻고자 한 것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눈 감고 기다리고 있는 소녀를 본 순간 이성을 잃고 말았다. 오래전 자신이 그토록 바랬던 상황이 거기에 있었다. 이제는 모든 걸 놓칠 위기였다.
‘안 돼 안 돼 안 돼. 이럴 순 없어.’
남자는 손잡이를 더욱 세게 돌렸다. 소년이 문을 열어주지 않을까 싶어 문을 손으로 두들겨 보기도 했다. 열리지 않았다. 발로 쾅 쾅 차보기도 했고 몸으로 부딪혀도 보았다. 그래도 꼼짝하지 않았다.
‘굳이 이렇게 해야 할까.’
남자는 한참을 문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제풀에 지쳐 문 앞에 주저앉았다. 달빛을 가린 구름이 물러가자 어두웠던 거실 안이 환하게 변했다. 어두워 잘 보이지 않던 가족사진이 보였다. 그 밑에 소파도 보였다. 평소에 잘도 숨어 다녀서 찾기 힘들던 리모컨도 보였다. 지금은 아무도 없는 바닥이지만 편하게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남자를 상상할 수 있었다.
'...'
남자는 다시 실랑이를 벌이던 문을 바라보았다. 문만 열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그러려고 이때까지 노력한 게 아닌가. 하지만 원하는 걸 얻으려면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도 있다. 그건……
‘내가 생각할 필요가 없지. 뭘 훔치는 것도 아니야. 어차피 내꺼야.’
남자는 다시 찬찬히 문을 살펴봤다.
‘이때까지 해놓은 게 있다. 잘 살펴보면 있을 거야.’
문 오른쪽 위에 있는 경첩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남자는 흔들거리는 경첩을 세게 당겼다.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좀 더 힘을 주었다. 흔들어서 당겼다. 경첩에 붙은 나사가 하나둘씩 떨어졌다. 나사가 모두 빠지면서 경첩도 떨어졌다. 틈이 생겼다. 남자는 지렛대로 쓸 수 있는 물건을 찾아보았다. 현관문 신발장에 남자의 아버지가 둔 연장이 생각났다. 남자는 연장을 챙겨 남은 경첩도 뗐다. 문이 크게 흔들거렸고 이내 큰 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졌다. 자고 있던 소년은 큰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일어났다. 구름이 달을 가리기 시작했다. 남자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이 점점 어두워졌다.
8
“뭐 하시는 거예요?”
소년의 유약한 손이 떨렸다.
“항상 그 작은 손이 마음에 안 들었어.”
“네?”
“남자로 태어나서 손도 작고, 키도 작고…… 그래서 못 하는 줄 알았어.”
“……”
남자는 놀란 토끼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소년의 뺨을 어루만졌다.
“이렇게 잘 생겼는데.”
소년은 괴물 가죽으로 뒤덮인 것 같은 촉감 때문에 소름이 끼쳤다. 소년은 바닥을 더듬거려 무기로 삼을 만한 걸 찾아보았지만 좀처럼 잡히지가 않았다.
“그걸 너무 늦게 알았어.”
남자의 손이 소년의 목을 내려오는 순간 소년의 손에 핸드폰이 잡혔다. 남자의 손이 힘이 쥘 힘껏 남자의 관자놀이를 쳤다. 남자는 악 소리를 내며 나가떨어졌다. 소년은 발로 남자를 찬 뒤에 젖 먹던 힘까지 내서 일어섰다. 남자는 소년을 놓칠 생각이 없었다. 남자는 소년의 발목을 잡았고 균형을 잃은 소년은 일어서자마자 바로 넘어졌다. 남자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소년의 몸 위로 올라갔다. 소년은 바동거리며 발악을 해보았지만 남자의 체중에 꼼작할 수 없었다.
“이거 내 몸이거든.”
남자는 천천히 소년의 목을 졸랐다.
“내 몸이야,,, 내 몸,,이라고,,”
소년은 숨이 막혀올수록 더욱 바동거렸다.
“네 몸이기도 한데 잘 쓰기에는 넌 너무 어려.”
소년은 더 할 말이 있었지만 남자가 입을 막아버리는 바람에 말할 수가 없었다.
“너랑 같이 잘 지내보려고 했어. 내가 못했던 것들을 넌 할 수 있게 해주려고 했지. 근데 그 여자애가 키스하려 할 때 확실히 알겠더라. 난 돌아가려고 했지. 잠깐 들리려고 온 게 아니야.”
회색빛이 소년의 시야를 점점 가렸다. 가리면 가릴수록 남자 얼굴 앞에 깔려 있던 안개가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이게 그 사람이 말하던 대가였나 봐. 내가 원하는 걸 얻으려면 날 죽여야 하는 거.”
완전히 시야가 가려질 때 남자 얼굴 앞에 있던 안개도 완전히 사라졌다. 소년은 이제야 남자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안개 너머에는 자신과 닮은 얼굴-나이든 자신이 있었다.
“너라도 내처럼 했을 거야……그렇겠지?”
구름이 달을 모두 가렸고 방 안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9
소년이 눈을 떴을 땐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시간을 해보니 점심 먹을 시간도 한참 지나있었다.
“윽..”
소년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힘겹게 일어났다. 소년의 손이 사시나무 떨리듯 흔들리고 있었다. 소년은 두 손을 서로 붙잡고 크게 한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몇 초 간 숨을 참았다. 흐흡. 숨을 크게 들이켰다. 후우 크게 내쉬었다. 소년은 다시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오른손으로 왼손을 만지고 왼손으로 오른손을 만졌다. 이번에는 왼쪽 팔, 어깨, 얼굴.
소년은 미소 지으며 방 밖으로 나갔다. 악몽은 지나갔다. 새로운 해가 밝았으니 새로운 날을 시작해야지. 소년은 기쁜 마음으로 방문을 열었다.
0
“눈 뜨면 어릴 적 때로 돌아가 있을 거야.”
“근데 아까 뭔 대가가 있다고 하셨는데 그게 뭐에요?”
“그러게. 가보면 알아. 내키지 않으면 다시 돌아와도 좋아."
“뭐, 속는 셈치고 해보죠.”
10-1
“과거로 돌려보내주세요.”
“……”
“생각해보니 저번에는 복권 번호를 모르고 갔더라고요. 복권 번호를 미리 알고 투자금을 챙기면 코인으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을텐데.”
“한 번 해봤으면 대가를 알텐데?”
“알고 있어요.”
“그래? 그런데도 간다니 욕심이 많구먼. 뭐, 네가 가고 싶다면 언제든지 가도 좋아.”
9-2와 10-2
소년이 방문을 열자 어떤 사람이 서 있었다.
소년은 물었다. 누구냐고. 갑자기 나타난 정체불명인은 아무 대답 없이 서 있었다. 소년은 자신보다는 크지만 아직 성인이라기에는 앳된 피부를 보고 청년이 아닐까하고 어렴풋이 짐작했다. 짧지만 길게 느껴지는 정적. 소년은 한 번 더 누구냐고 물어보려고 할 때 청년이 말했다.
“수호천사.”
메아리처럼 윙 윙 울리는 목소리. 소년은 청년의 목소리를 듣자말자 그가 누군지 단번에 알게 되었다. 소년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웃고 또 웃었다. 소년은 목이 쉴 때까지 웃다가 숨 한 번 고르고 자신 앞에 있는 청년을 보았다. 그제야 소년은 알게 되었다. 대가란 자신과 똑같은 욕심을 가진 자신을 끊임 없이 보게 되는 것이란 걸.
내가 죽느냐
내가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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